"눈을 떴으니까, 그래서 좋아요."
언행일치라는 표현을 여기에다 써도 될까, 김정자 할머님의 표정에서 행복함이 보였다. 8남매의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학교에 가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불현듯 터진 6.25 전쟁의 여파로 배움의 기회는 물론 하루 하루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험난했다. 그렇게 흘려보낸 세월 속에서 우연히 만난 문해학교에서의 수업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새롭고, 즐겁게 만들었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문해학교 학생들의 사연은 '유퀴즈온더블럭'의 MC를 울렸고, 시청자를 울렸다. 해당 회차는 2019년 10월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수상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미자는 시를 배우기 위해 문화센터를 방문한다. 수업에서 선생님은 누구나 가슴 속에 시를 품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창작의 3단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제대로 보는 것. 둘째, 진정한 아름다움을 구분하는 것. 셋째,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나서는 것. 이 일련의 과정은 곧 그들의 일상을 다시 보고, 의미를 찾는 과정이었다.
제대로 보는 것에서부터
<칠곡 가시나들> 영화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다.
동네의 할머니들이 길을 가다가 간판을 보고 섰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화면은 할머니들이 뒷짐을 지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는 표정, 서로 말을 주고 받다가 꺄르르 웃는 모습을 비춘다. 시청자는 어느덧 발견한다. '아, 할머니들이 간판의 글자를 읽고 있었구나.' <유퀴즈온더블럭>에 나온 문해학교 할머니들처럼 영화 속 할머니들 역시 문해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운다. 한글을 배우면서 할머니들은 동네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읽지 못했던 동네 간판들, 판매하는 나물의 이름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멈춰서는 일이 많아진다.
예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시나들>의 할머니들은 숙제로 자신이 매일 보는 풀과 나물에 관한 백과사전을 작성한다. 전에는 흘러갔던 일상을 제대로 보고, 관찰하면서 할머니들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향해
글을 배우고, 시상을 찾기 시작하면서 할머니들의 세상은 전과는 달라졌다.
<칠곡 가시나들>의 박금분 할머님은 '시'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가마이 보니까 시가 참 만타.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가수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시. 죽은 영감에게 글 배운 거 자랑하고 싶은데 아쉽다는 시. 죽고 싶으면서도 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시. 아파트에 사는 것이 몸이 편하지만 동네 할머니들을 보고 싶다는 시까지.
시상은 천지삐까리였고, 할머니들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어 표현하기 시작했다.
삶과 글은 별개가 아니듯, 할머니들의 삶과 닮은 시였다. 웃프지만, 곧 그들의 삶이었다.
<칠곡 가시나들>, <가시나들>, <시> 각각의 메시지는 조금씩 달랐지만, 글을 몰라 불편했고, 시를 몰라 일상을 흘려보냈던 할머니들의 시가 소재였다. 나이만 달랐을 뿐이지 밭일하면서 다른 할머니한테 숙제를 했는지 물어보는 모습, 숙제하기 싫다는 투정, 그래도 학교 등교 시간은 맞춰서 책가방을 매고 집을 나서는 모습은 영락없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가끔, 때로는 자주 잊는다. 할머니도 우리와 같이 일상의 순간을 즐기고, 배움에 열정적이고, 일상의 새로움에 흥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임을 말이다. '한글', '시'라는 소재가 그 점을 일깨워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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