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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유쾌한 글로 가득한,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by cho_bibim 2021. 11. 18.

여행을 '살러'가 아닌 '문맹 체험'을 위해 가겠다니. 이 책은 발상 자체가 재미있었다. 

저자는 10년 동안 일했던 한국어 교실에서 한글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런 낯선 기행을 감행한 그들의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고 한다. 그 신기한 경험을 해보기 위해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상하이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고, 주저 없이 문맹의 상태를 감행해보기로 결정한다. 새로움, 낯섬의 경험 때문일까, 이 책은 시종일관 발상이 유쾌하고, 문체가 재치 있었다.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위주로 정리해보았다.


#1 누구나 경험하는 은도끼 금도끼적 순간

 

사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저자는 상하이로 놀러온 가족들을 위해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체계적인 계획을 준비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문맹 체류기의 문제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관광지로 가려는 그 순간, 어떤 버스를 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그즈음, 그에게 은도끼 금도끼적 순간이 찾아온다. "이 버스가 네 버스냐?"

자취집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엄마가 전화가 왔다. "계속 자취할 거니?" 최근의 은도끼 금도끼적 순간이었다. "이 자취집이 네 집이냐?"의 질문에 고민이 됐지만, 결국 자취를 이어서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본가에 가서 매일 엄마의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회를 놓친 게 아쉽지만, 그래도 자취의 즐거움도 놓칠 수 없지. 나의 도끼를 잘 활용할 생각이다.

 

#2 세상의 디폴트 값을 벗어난다는 건

 

디폴트 값이란, 컴퓨터에서 딱히 사용자가 따로 지정하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주어지는 값이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매일매일 새로운 디폴트 값을 찾는 숨은 그림찾기의 과정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의 디폴트 값이 먹히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기본값이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국은 디폴트 값이 꽤 많은 사회이다. 명문고, 수능, 명문대, 스펙,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디폴트 값은 이미 사람들 내면에 내재화 되어 있다. 최근 '종이의 집'을 보고 스터디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극 중 라켈 경감이 사건을 해결하는 중에 밥을 먹으러 나간 상황을 보며, 몰입감이 깨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건을 해결하는 건 경감이라는 직업에 시급한 일이기도 하지만, 또 밥을 해결하는 것도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확실히 <종이의 집>은 일에 미치고, 목표가 뚜렷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한국사회의 모습과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이미 우리는 각자의 n 년 동안의 한국 사회 디폴트 값이 있을지도 모른다.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저자처럼 문맹 체류기를 하지 않는 이상.

 

#3 누구나 영원한 밤의 도시를 하나씩 품고 있다

 

저자는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출근하는 길에 올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모든 세상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대 도시의 파도 속에서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점과 점을 이동한다. 지하철이라는 영원한 밤의 도시에서 각자의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며, 그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른다고 이야기한다.

 

#4 모든 것은 이 맛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글이었다. 아침부터 저자는 고장난 인덕션 때문에 저자는 길을 나선다. 샤오미 매장으로 들어선 그는 외출 준비를 한 김에 스마트 시계를 장만하자는 생각이 든다. 미 밴드를 사고 나오는 길, 그는 외출 준비를 하고, 걸어 나온 자신에게 기네스 맥주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맥주에는 당연히 안주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그 순간, 그의 손에는 연어회도 들려 있었다. 집에 온 그 순간, 그는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이 연어회의 맛을 느끼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우기고 싶어 진다. 이 맛을 느끼기 위한 운명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논리 같은 건 때려치우자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이 맛 때문이었으므로.